
이번 기고에서는 ‘좋은 의도’의 얼굴을 한 관광, 즉 볼런투어리즘(voluntourism)을 이야기해 보려 한다.
봉사(Volunteer)와 관광(Tourism)을 합친 이 단어는, “여행도 하고, 현지도 돕자”는 매력적인 약속을 담고 있다. 언뜻 들으면 반박하기 어려운 말이다.
하지만 최근 연구들을 따라가다 보면, 이 선한 의도가 언제나 선한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는, 조금 불편한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돕고 싶어서 왔습니다”라는 말의 그늘]
볼런투어리즘은 대체로 고소득 국가의 여행자가 저소득 국가나 취약 지역을 찾아 몇 주 혹은 몇 달 머물며 교육·건축·환경정화·보건 등의 활동을 하는 형태를 가리킨다.
여러 연구는 이 경험이 자원봉사자 개인에게는 삶을 바꾸는 경험이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문화적 교류, 세계시민성, 자기성찰, 진로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고 응답하는 사례가 반복해서 보고된다.
그러나 같은 연구들은 동시에 이렇게 경고한다. “도움을 주겠다는 마음이, 언제나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미국 러벅(Lubbock)의 한 지역을 대상으로 한 2024년 질적 연구에서는, 주민들이 볼런투어리즘의 긍정적 효과(공동체 결속, 환경 보전 등)를 인정하면서도, 의존성(dependency), 문화적 둔감함, 불균형한 권력관계에 대한 우려를 함께 표했다.
연구진은 “볼런투어리즘은 공동체 참여를 촉진할 잠재력이 있지만, 동시에 신식민주의(neocolonial) 서사를 재생산하고 문화적 강요와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고착화할 위험도 크다”고 결론짓는다.
또 다른 통합 리뷰는, 기획이 잘못된 경우 볼런투어리즘이 “지역의 바람과 관습을 무시하고, 숙련되지 않은 자원봉사자가 일을 느리게 하거나 미완성으로 남기고 떠나며, 지역 경제를 교란하고, ‘타자’에 대한 고정관념과 빈곤의 합리화를 강화하며, 문화 변화를 촉발할 수 있다”고 정리한다.
요약하면,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온 것이, 때로는 현지의 시간과 자원, 자존심을 빼앗아 가기도 한다는 이야기다.
[경제 효과, 정말 지역에 돌아가고 있는가]
볼런투어리즘은 흔히 “현지에 돈이 떨어지는 방식”으로도 정당화된다.
자원봉사자들이 체류하면서 숙소·식비·교통·기념품을 소비하고, 프로젝트 참가비도 개발에 쓰일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일부 연구에서는 실제로 자원봉사자들이 지역 소상공인에게 돈을 쓰고, 프로젝트가 지역 내 창업과 고용을 자극하는 긍정 사례도 보고한다.
하지만 이 구조를 조금만 뜯어 보면, 돈의 흐름은 생각보다 다르게 흘러간다.
유럽의 한 연구는 대표적 볼런투어리즘 프로그램들의 수입 구조를 분석한 결과, 참가자가 지불한 전체 비용 중 평균 25%만이 지역사회에 직접 흘러 들어가고, 나머지는 본국의 중개기관·운영비·마케팅·여행비용으로 빠져나간다고 보고했다.
또 다른 분석에서는 일부 프로그램에서 참가비의 18%만이 실제 프로젝트 현장에 배분되고, 80% 이상이 항공료·숙박·기관 운영비로 쓰인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APEC 지역 볼런투어리즘을 다룬 보고서 역시, “자원봉사 관광의 경제효과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참가 전·중·후의 모든 지출 흐름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그 중 얼마가 실제로 지역 노동·기업·공공서비스로 들어가는지 따져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같은 보고서에 참여한 관계자들의 다수는 “볼런투어리즘이 지역 경제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면서도, 현재 방식은 단기적·단편적·의존성을 키우는 형태가 많아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구조는 어딘가 익숙하다.
빈곤과 취약성을 전면에 내세운 상품을, 상대적으로 부유한 여행자에게 판매하고, 그 수익의 상당 부분을 중개자와 운영자가 가져가는 구조—일부 연구자는 이를 “가난을 관광 자원으로 상품화하는 또 다른 산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이들을 향한 선의, 어떻게 착취가 되는가]
볼런투어리즘 논쟁에서 가장 논쟁적인 영역은 고아원·아동시설 자원봉사다. 아동권 단체와 국제기구들은 “고아원 관광(orphanage tourism)”이 아동에 대한 폭력과 착취를 동반할 위험이 크다고 반복해서 경고해 왔다.
2024년 발표된 한 테마 보고서는, 고아원 관광과 볼런투어리즘이 아동 학대·착취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렇게 설명한다.
- 고아원에 대한 후원과 자원봉사 수요가 늘어날수록, 실제로는 부모가 있거나 친척이 있는 아이들까지 고아원에 장기 수용하는 ‘수요 창출’이 일어난다.
- 아동을 상시적으로 외부인의 관심과 기부 대상으로 두기 위해, 아동의 빈곤·슬픔을 과장하거나 재현하는 연출이 반복된다.
- 이 과정에서 아동의 가족과 공동체 기반 보호를 우선하라는 아동권 규범과 국가의 ‘게이트키핑’ 역할이 무너지고, 아동의 장기적 발달과 이익은 뒷전으로 밀린다.
보고서는 “착취나 이윤을 목적으로 아이를 시설에 유치·이동시키는 행위는 현대판 노예제·아동 인신매매의 한 형태인 ‘고아원 인신매매(orphanage trafficking)’에 해당한다”고 못 박는다.
무엇보다 문제는 계속 떠나는 관계다. 짧게는 며칠, 길어도 몇 주 머무르는 자원봉사자가 아이들과 강한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떠나 버리는 일이 반복되면 아동은 버려짐·상실 경험을 계속 겪게 된다.
이별에 익숙해지는 아이는 없다. 볼런투어리즘이 “아이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준다”는 홍보 문구 뒤에는, 이렇게 반복되는 정서적 상실과 애착 손상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을, 어떻게 다시 설계할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모든 볼런투어리즘을 “위험한 산업”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잘 설계되고, 공동체가 주도권을 쥔 프로젝트는 분명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 수 있다. 여러 연구는 볼런투어리즘이 공동체 결속 강화, 교육·환경 개선, 자존감 회복, 문화 간 이해 증진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고한다.
지역이 필요로 하는 인프라·교육·보건 서비스를 단기간 보완하고, 장기적으로는 네트워크와 자원을 연결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 사례들은 공통적인 조건을 갖는다.
- 지역이 먼저 말하게 했는가: 프로젝트 주제와 우선순위가 외부 기획자가 아니라, 지역 주민·단체의 요구에서 출발했는가.
- 지속성을 설계했는가: 자원봉사자가 떠난 뒤에도 유지될 수 있는 구조(현지 인력·재원·제도)를 함께 만들었는가, 아니면 “사람 바뀐 사진만 남는 프로젝트”로 끝났는가.
- 대체가 아니라 보완인가: 자원봉사자의 노동이 현지 일자리를 대체하지 않고, 기술·지식 전달과 역량 강화로 이어지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는가.
- 돈의 흐름이 투명한가: 참가비와 기부금 중 얼마가 실제 지역으로 갔는지, 얼마가 운영기관과 여행경비로 쓰였는지 공개되고 있는가.
- 관계의 방향이 수평적인가: “도와주는 사람–도움을 받는 사람”이라는 위계가 아니라, 서로 배우는 동반자로 만날 수 있도록 언어·이미지·프로그램이 구성되어 있는가.
관리자 관점에서 볼런투어리즘을 분석한 한 연구는, “위에서 내려보내는(top-down) 자원봉사가 아니라, 지역과 함께 설계하고(co-creation), 지역이 프로젝트의 방향과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또 다른 비평은 “볼런투어리즘의 영향은 숫자로만 측정할 수 없으며, 각 공동체의 맥락과 권력관계, 장기적 가능성을 함께 해석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본 기고에서 남기고 싶은 한 줄]
관광과 개발, 자원봉사를 함께 다루다 보면, 우리는 자주 “의도”에 집중한다. “그래도 좋은 마음으로 온 사람들 아닌가요?”라는 말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연구들이 반복해서 보여 주는 것은 이것이다. 좋은 마음이 항상 좋은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질문을 제안하고 싶다.
-이 프로젝트가 없다면, 이 공동체는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 문제를 해결했을까.
-우리가 가져온 도움은, 이곳의 자립 능력을 키우는가, 아니면 “다음 봉사팀을 기다리는 구조”를 만드는가.
-사진 속 웃는 얼굴 뒤에, 누군가의 상실감·자존감의 상처·일자리 상실은 남지 않는가.
마치며, 이렇게 적어 본다.
볼런투어리즘은 선한 마음의 언어를 쓴다.
하지만 그 선의가 진짜 도움이 되려면, 먼저 멈춰 서서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이곳을 돕고 싶다는 마음은 진짜다.
그렇다면, 이 마음이 이곳의 내일을 망치지 않게 하려면 무엇을 다르게 해야 할까.”
관광은 언제나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다.
볼런투어리즘이 그 만남을 ‘구원의 서사’가 아니라 ‘함께 배우는 서사’로 바꾸는 날, 우리는 비로소 이 단어를 조금 더 편안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이강일 | 관광산업 연구자·저자. 관광의 미래를 읽고, 현장의 길을 설계하다.]